직장에서 해고되면, 해당 정보가 곧바로 이웃에게 전달돼 ‘퇴출’ 압박을 받게 된다. 무직자의 존재는 집값 하락의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사내 점심 메뉴는 자체 개발한 앱을 통해, 부서원들의 손떨림, 심박수를 통해 정해진다. IT소설집 ‘10년 후의 일상’에 수록된 33편의 짧은 소설은 과학기술이 지금보다 발전한 10년 뒤의 세계를 살아가는 인간의 일상을 담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10년 뒤인 2026년 우리의 흔한 일상을 보여주는 단편 소설 7편을 연재한다. [편집자주]
하나밖에 없는 딸 대신 유일한 대화 상대가 되어 주는 스마트폰 앱
앱으로 새로운 상대 만나고, 앱이 새로운 상대가 되는 세상
아빠, 병원에서 겨울 점퍼는 주죠? 날이 차가우니 바깥 산책 나가실 때 꼭 점퍼 입고 나가세요.
험버트 씨는 시큰둥한 얼굴로 가족을 위한 건강 SNS인 ‘패밀리 서클(Family Circle)’을 종료해 버렸다. 자신의 주간 건강 데이터 페이지에는 오늘도 딸 에밀리의 말뿐인 걱정만 달려 있었다. ‘패밀리 서클’의 마지막 게시물엔 험버트 씨의 지병인 당뇨병 트렌드와 지난 일주일간의 수면 시간, 몸의 온도 변화, 운동 정보 등이 깔끔한 그래픽으로 정리되어 있었다.
그러나 험버트 씨는 기분이 우울해 보고 싶지도 않았다. 그는 딱히 통증은 없었지만 애먼 신음소리를 내며 침대에서 돌아누웠다. 그의 등 옆에 놓인 스마트폰에서는 딸이 남긴 댓글이 여전히 반짝거리고 있었다.
험버트 씨는 알고 있었다. 지금 에밀리는 수잔 씨의 아들과 여행 중이란 것을. 그 두 사람은 가족끼리 연동된 ‘패밀리 서클’에서 만났다. 아이러니하게도 험버트 씨와 수잔 씨는 같은 요양원에 있지도 않았고, 서로 만난 적도 없었다. 단지 같은 ‘패밀리 서클’이란 헬스케어 SNS서비스를 쓰며 가족 연동 서비스를 이용하고 있을 뿐이었다.
가족 연동 서비스를 신청한 건, 15년 전 죽은 아내가 남기고 간 유일한 가족인 딸 에밀리였다. 에밀리는 이 연동 서비스를 통해 수잔 씨의 아들과 만나 불같은 사랑에 빠졌다. 지난 반년 동안 집에서 20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험버트 씨의 요양원에 단 한 번도 찾아오지 않을 정도로 뜨거운 사랑이었다.
잠깐 잠이 들었는지 분명하지 않았다. 험버트 씨가 눈을 떴을 때, 창밖에서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창밖에서 내리는 눈은 소리가 나지 않아서 어찌 보면 그림 같기도 했다. 뒤에서 누군가 험버트 씨를 불렀다.
“험버트 씨.”
험버트 씨는 돌아누운 자세 그대로 대답했다.
“그레이스 군인가.”
“올해 첫눈이 오네요.”
“언제부터 있었나? 그리고 날 부를 때 그 ‘씨’라는 호칭은 이제
그만두게.”
“워낙 오래된 습관이라서 그래요. 그냥 봐주세요. 저 눈도 겨울의 습관이잖아요?”
“뭐?”
“제가 너무 재미없게 말했나요?”
“작년 첫눈이 왔을 때도 우린 꼭 이런 대화를 한 것 같은데.”
“후훗. 사람 사이의 대화에 특별할 게 있나요. 사람의 대화란 항상 같죠. 거리는 정해져 있는 거예요. 설탕은 달콤하고 소금은 짠 것처럼요.”
“내가 방금 잠에 들었던가?”
“네, 맞아요. 험버트 씨는 방금 정확히 14분을 잤어요.”
“그렇게 정확하게 얘기하지 말라고.”
“저보고 맞장구나 치라는 얘기인가요?”
“아니. 자네도 자네 방식의 맞장구가 있는 거겠지. 자네 말대로라면, 사람 사이의 모든 대화는 맞장구 쳐주는 것에 지나지 않으니.”
‘그레이스 군’은 험버트 씨의 스마트폰 속에 사는 앱이다. 그는 험버트 씨의 일상을 조용히 관찰하다 그가 특정한 유형의 행동을 보이면 깨어났다. 가령, 방금처럼 험버트 씨가 잘 시간이 아닌데도 등을 돌리고 누워 있으면서 한숨을 쉬는 경우 말이다.험버트 씨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창가로 다가가 두 눈을 감았다. 진정 첫눈을 보고 싶었던 것은 아니다.
“…….”
“그레이스 군, 대답이 없구먼.”험버트 씨가 다시 몸을 돌렸을 때, 거기엔 불이 꺼진 스마트폰 한 대가 놓여 있었다. 배터리가 다 소진된 모양이었다.
험버트 씨는 사이드 테이블 위에 있는 조명을 껐다. 이제 방 안에서 반짝이는 것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오직 창밖의 눈만이 조용히 반짝이며 날아가는 것처럼 보였지만 추락하고 있었다. 그렇게 높은 곳에서 떨어져도 전혀 아프지 않을까? 험버트 씨는 왠지 그 눈이 느낄 추락의 무게를 자신이 대신 느끼는 듯했다.
칼럼니스트 : 편석준
매체 : 조선비즈
발행일시 : 2016년 6월
관련 링크 :
http://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6/06/03/2016060301267.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