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의 칼럼은 2013년 1월 22일에 작성됐습니다.
할부 거래를 한 마디로 표현하면 ‘지금 사고 나중에 지불한다’이다. 할부는 일정 기간 동안 조금씩 갚아간다는 의미이므로 그 기원은 소박하게나마 거래가 존재했던 고대부터이다. 할부 거래가 본격화된 건 자본주의의 발전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자본주의의 급격한 득세는 기존의 농업∙어업 등의 산업보다 부가가치가 훨씬 높은 제조업의 발전에서 비롯됐다.
자본주의와 함께 성장한 할부 거래 (사진 출처 : flickr에 uncorneredmarket님이 올린 사진)
[할부의 기원]
제조업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해서는 꾸준한 수요 발생이 필요한데 매달 임금을 받는 노동자들로서는 고가의 상품을 일시불로 구매하기 어려웠다. 할부 거래의 대부분이 월부인 까닭도 급여의 보편적인 형태가 월급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경우에는 생산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1차 세계대전 이후에 할부 거래가 본격화됐다. 1926년까지 미국에서 팔린 자동차의 65%가 할부로 팔려나갔고 백화점의 매출액 가운데 40%가 할부란 외상 거래였다. 1990년대의 소비를 진작시킨 것이 신용카드 등에 의한 신용거래였다면, 그 이전까지 소비를 활성화시킨 것은 할부 거래였던 셈이다.
할부 거래가 노동자 가구의 소비를 진작시키기 위한 전략적 제도였다는 것은 1차 세계대전 이후 할부 거래가 보편화 된 시점에서도, 상류층들은 할부 거래를 혐오했다는 데서도 알 수 있다. 돈 많은 상류층들은 할부 거래를 돈 없고 계획성 없는 가난뱅이들을 위한 제도라고 인식했다. 노동자들이 일종의 외상인 할부 거래(할부판매는 처음부터 소유권을 갖게 되는 신용판매와 달리 대금을 완납했을 때 상품에 대한 소유권이 양도된다)에 겁 먹지 않는 이유는 미래에도 현재 이상의 수입이 보장돼 있을 거라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제 불황이 닥쳐오면 할부 잔여금은 그대로 채무가 될 수도 있다. 실제 미국의 쿨리지 대통령 시절에 상무장관을 지낸 하버트 후버 대통령은 1926년에 이미 ‘지나친 할부구매는 장기적으로 미국의 경제적 번영을 앗아갈 것이다’란 우려를 수 차례 표명했다.
[할부의 보편화]
할부 거래가 완성된 것은 할부 거래가 1950년대 이후 전산화 되면서였다. 그전까지는 아무리 작은 금액의 할부 거래라 해도 지금의 은행 대출 업무처럼, 건 별로 수기로 서류를 작성하고 간부급까지 보고가 되어야 했다. 어떤 은행은 이자율에 근거해 수취하는 할부수수료 매출이 운영비보다 작아 할부 거래 업무를 중단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후 전산화가 되고 동시대에 본격화된 신용거래가 활성화되면서 할부 거래는 되돌릴 수 없는 보편화를 이루었다.
기업들은 성장을 위해 자신들이 만든 고가의 상품이 일반 가정에게 필수품임을 광고하고 해당 상품을 소유하지 못한 사람들을 열등감에 빠지게 하는 ‘구별 짓기’란 문화적 전략도 취했다. 이는 휴대폰 메이커들도 마찬가지이다. 휴대폰 보급률(휴대폰 개통 건수/전체 인구수)이 100%를 넘기 전에는 휴대폰 소유 유무를 두고, 보급률이 100%를 넘은 뒤에는 이미 보편화된 용어인 ‘저가 피쳐폰 vs. 고가 스마트폰’ 구별 짓기 전략을 취했다.
할부 거래 대상이 되는 대부분의 상품은 내구소비재이다. 내구재(耐久財)란 기업들이 광고하는 대로 제품을 튼튼하게 잘 만들어서 얼마든지 오래도록 쓸 수 있는 제품을 말한다. 하지만 만약 TV를 구매한 가정이 이후 20년 동안 교체를 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제조한 기업은 생존할 수 있을까?
대부분의 내구소비재의 보급률이 100%를 넘은 상황에서는 ‘교체 주기’를 최대한 줄여야 기업들은 성장세를 유지할 수 있다. 기업들이 새로운 기능과 디자인이 추가된 제품을 일정한 사이를 두고 끊임없이 쏟아내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전에 쓰던 제품들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계획적 진부화(Planned obsolescence)’는 기업들의 오래된 전략이다.
[휴대폰 할부와 약정]
▲ 출처: 디지털데일리(2012.10.24)
2011년까지만 해도 보편적인 휴대폰 할부기간은 24개월이었지만, LTE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2012년부터는 할부기간이 30개월로 늘어났다. 휴대폰 할부기간이 늘어난 것은 휴대폰 메이커들 입장에서는 좋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휴대폰 할부기간이 늘어난 근본적 원인은 휴대폰 메이커들에게 있다. 마진이 높은 고가의 휴대폰을 보통의 월급쟁이와 학생들에게 팔기 위해서는 할부기간을 늘리는 것 외에 다른 대안이 없는 것이다. 늘어난 할부기간이 사용기간을 보증하지는 않는다. 휴대폰 사용기간은 특히 20~30대들에서는 더 줄어들 수도 있다. 더 놀랍고 트렌디한 스마트폰들이 전보다 더 빠른 속도로 쏟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휴대폰 할부기간과 동일하게 요금할인을 제공하는 이통사들 입장에서는 할부기간이 늘어날수록 좋다. 현재 이동통신시장에는 2개의 약정이 존재한다. 단말기 보조금을 지급한 대가로 체결하는 단말기 보조금 약정과 요금할인 제공하는 체결하는 요금할인약정(12년 11월에 SKT가 최초로 실시했고 13년 1월 7일부터는 KT에서 시작함)이 있다.
시작된 지 얼마 안 되는 요금할인 약정은 일단 논외로 하고 단말기 보조금 약정은 이통사들 입장에서는 실제 약정 구실을 하지 못했다. 약정 중 해지하면 위약금을 수취하긴 하지만 13개월째부터 위약금이 줄어드는 형태라 경쟁 통신사들이 위약금을 대납하고 충분히 가입자를 끌어올 수 있었다.
실질적으로 약정의 역할을 한 것은 단말기 할부와 맞물려 제공되는 요금할인이었다. 잔여 할부를 중도에 완납했을 경우에 요금할인이 중단되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고가의 스마트폰일수록 할부원금이 크므로 가입자 입장에선 약정기간 중에 해지하기가 부담스러운 것이다.